엄마를 볼 때면 괜시리 서글퍼질 때가 있다.
엄마가 하고 싶었던 것, 엄마가 멋있게 할 수 있는 것.
그런 일들로부터 뜻하지 않게 어느새 아주 멀어진 지금의 엄마.
스무살의 엄마는 지금의 엄마를 상상이나 해봤을까.
어젯밤 엄마는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왜 행복하지를 않지.
엄마는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본인이 행복에 무딘 탓을 들었다.
또 사람들에게 밉보이기 싫어 기쁜일에 맘껏 행복해 못했다는 탓을 들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는 덜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행복해보였던 순간들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지금보다도 내가 아주 더 작았던 시절, 엄마는 나의 눈에 멋진 사람이었다.
하고 싶었고, 잘 할 수 있던 음악 일을 하던 엄마는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집에 그 많던 피아노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겨 둔 피아노 한대는 3년전 서재방으로 들어가버렸고
그간 굳게 닫힌 건반 덮개는 좀처럼 열려있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엄마의 행복은 그 건반 덮개 속에 함께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몰라.
엄마는 피아노 교습을 마무리짓던 날 어떤 마음이었을까.
적어도 그날 저녁에 따뜻하게 한번 엄마를 안아줬어야 했는데.
엄마는 이제 정말 엄마뿐인 사람이 되었다.
실력있는 피아노 선생님도, 세미나에 나가 계속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도,
작곡과외를 하는 사람도 아닌 정말 그냥 원형이 엄마.
음악 일을 내려둔 엄마는 그새 더 나이가 들었다.
아직도 한번씩 다시 음악 일을 생각해보는 엄마지만
그런 엄마의 모습에서 자신감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엄마가 조금 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내 행복을 위해 기꺼이 엄마의 행복을 내던진만큼
나는 엄마가 앞으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2023년 01월 18일, 유성의 서재 한 켠에서
이따금 생각